아키쓰시마 (방호순양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키쓰시마는 1890년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건조된 방호순양함이다. 원래 마쓰시마급의 4번함으로 계획되었으나 설계를 변경하여, 일본 해군이 설계하고 일본에서 건조한 최초의 함선이 되었다. 이 함선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921년 잠수함 모함으로 변경되었고, 1927년에 퇴역하여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2년 선박 - 요시노 (방호순양함)
요시노는 1893년 영국에서 건조되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군함이었으나 1904년 러일 전쟁 중 장갑순양함 가스가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 1892년 선박 - 류리크 (1892년 장갑순양함)
류리크 (1892년 장갑순양함)는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해군이 건조한 장갑 순양함으로, 영국 해군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러일 전쟁 중 울산 해전에서 일본 해군과 교전 후 자침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군 함정 - 다카치호 (방호순양함)
다카치호는 일본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으로, 자매함 나니와와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순양함으로 평가받았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칭다오 공략전 후 독일 해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여 일본 해군 군함 중 최초로 교전 중 격침된 함선이 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해군 함정 - 가스가 (장갑순양함)
일본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 가스가는 아르헨티나 해군이 발주한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이었으나 러일 전쟁 직전 일본이 구매하여 취역,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베리아 간섭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 후 1942년 무장 해제, 부유 막사로 사용되다 1945년 요코스카 공습으로 침몰했다. - 청일 전쟁의 해군 함정 - 다카치호 (방호순양함)
다카치호는 일본 제국 해군의 방호순양함으로, 자매함 나니와와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순양함으로 평가받았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칭다오 공략전 후 독일 해군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여 일본 해군 군함 중 최초로 교전 중 격침된 함선이 되었다. - 청일 전쟁의 해군 함정 - 이쓰쿠시마 (방호순양함)
이쓰쿠시마는 1891년 일본 제국 해군에 인도되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1912년 2등해방함으로 분류가 변경된 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 1926년 해체되었다.
아키쓰시마 (방호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함명 | 아키쓰시마 (秋津洲) |
함명 유래 | 아키쓰시마 (秋津洲) 일본의 이명 |
함력 | |
소속 국가 | 일본 제국 |
기공 | 1890년 3월 |
진수 | 1892년 7월 6일 |
준공 | 1894년 3월 31일 |
취역 | 1894년 3월 31일 |
제적 | 1921년 4월 30일 군함에서 제외 |
퇴역 | 1927년 1월 10일 특무정에서 제외 |
최종 운명 | 1927년 7월 29일 매각 후 해체 |
건조 정보 | |
발주 년도 | 1889년 회계 연도 |
건조 조선소 | 요코스카 해군 공창, 일본 |
건조 비용 | 981,555 엔 |
기술 정보 | |
함 종류 | 방호순양함 |
배수량 | 3,100 톤 |
길이 | 91.7 m (수선장) |
폭 | 13.14 m |
흘수 | 5.32 m |
추진 동력 | 수평 3단 팽창 증기 엔진 2축 추진 6개 보일러 8,400 마력 석탄 800톤 |
속력 | 19 노트 (시속 35 km/h) |
승무원 | 330명 |
무장 | |
주포 | 15cm 포 4문 |
부포 | 12cm 포 6문 |
기타 포 | 47mm 중포 8문 8mm 5연장 포 4기 QF 6인치 /40 해군포 4문 QF 4.7인치 포 6문 QF 3파운더 호치키스 포 10문 4열 1인치 노르덴펠트 포 2기 |
어뢰 발사관 | 4문 |
장갑 | |
갑판 | 75 mm |
포방패 | 115 mm |
기타 정보 | |
소재 | 강철 |
2. 배경
아키쓰시마는 1889년 회계 연도 예산으로 계획된 일본 제국 해군의 유일한 순양함이었다. 원래는 프랑스의 군사 고문이자 해군 건축가인 루이-에밀 베르탱이 추진한 젊은 학파 철학에 따라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의 4번 함으로 계획되었다. 이 계획은 단일 거포를 주포로 하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조 당시부터 해군 내에서는 친영국파의 반대가 있었고, 마쓰시마급의 실제적인 효율성과 운용 유용성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이들은 단일 거대 카네 대포 대신 여러 개의 중구경 속사포를 장착하는 새로운 설계를 제안했다. 이 새로운 설계안은 기존 마쓰시마급보다는 영국의 영향을 받은 미국 해군의 방호순양함 볼티모어를 모방한 것이었다.
설계 변경 과정에서 초기 설계를 주도했던 베르탱은 강하게 반발하며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1] 하지만 결국 1894년, 해군 내에서는 친영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기존의 거포 중심 설계는 폐기되었다.[2]
이에 따라 아키쓰시마는 건조 도중에 계획이 변경되어 재설계되었으며, 마쓰시마급과는 전혀 다른 함선으로 완성되었다. 이 함선은 일본 제국 해군이 직접 설계하고 일본 내에서 건조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3. 설계
아키쓰시마는 원래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의 4번함으로 계획되었으나, 건조가 중단되고 재설계를 거쳐 이전 함급과는 다른 함선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 해군이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일본 내에서 건조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설계 과정에서는 미국 해군의 볼티모어(C-3)를 참고했다.
건조 계획 초기에는 프랑스의 군사 고문이자 해군 건축가인 루이-에밀 베르탱이 주도한 젊은 학파 사상에 따라 마쓰시마급과 유사하게 강력한 주포 1문을 탑재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다. 그러나 건조가 진행되면서 해군 내 친영파 세력의 반대가 커졌고, 마쓰시마급의 실제 운용 효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들은 거대한 카네포 대신 다수의 중구경 속사포를 장착하는 새로운 설계를 주장했다. 이는 기존 마쓰시마급보다는 영국식 설계에 가까운 볼티모어와 유사한 형태였다. 베르탱은 이러한 설계 변경에 강하게 반발하며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할 정도였으나,[1] 결국 1894년 친영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거포 대신 속사포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 구성이 확정되었다.[2]
선체 설계는 마쓰시마급의 마지막 함선인 하시다테를 기반으로 하여 동일한 이중 선저 구조, 방수 구획 설계를 적용했으며 기관 역시 동일한 것을 사용했다.[3] 아키쓰시마는 일본에서 건조된 함선 중 수입 강철을 사용한 마지막 함선이기도 하다.
무장은 처음에는 치요다를 참고하여 6인치 속사포 4문을 주 무장으로 고려했으나, 일본 해군은 화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4.7인치 속사포 6문을 추가로 장착할 것을 요구했다.[3] 이러한 무장 강화는 함선 상부 구조의 중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아키쓰시마의 설계는 상부 구조가 지나치게 무거워져 무게 중심이 높아졌고, 이로 인해 함선의 안정성이 부족하고 항해 성능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2]
3. 1. 무장
아키쓰시마의 주포는 당시 영국의 암스트롱사가 제작한 '암스트롱 1892년형 15.2cm 40구경 속사포'(QF 6 inch /40 naval gun)를 채택했다.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이 무기 조달을 영국 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 이 함포는 영국의 전노급전함 로열사브린급이나 이탈리아의 전노급전함 레움베르토급의 부포로도 사용될 만큼 성능이 우수한 포였다. 45.3kg의 포탄을 최대 앙각 15도에서 9140m까지 발사할 수 있었으며, 분당 5~7발의 빠른 발사 속도를 가졌다. 이 주포 4문은 방패가 달린 단장 포가 형태로 상부 갑판의 포곽(sponson)에 설치되었는데, 앞쪽 돛대 양옆과 주 돛대 뒤쪽 선미에 각각 2문씩 배치되었다. 포의 부앙 능력은 앙각 15도, 부각 3도였고, 좌우 150도까지 선회할 수 있었으나 포신의 조작, 포탄 운반 및 장전은 주로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이러한 속사포는 마쓰시마형 방호순양함의 주포에 비해 발사 속도가 훨씬 빨라 실용적인 면에서 큰 장점을 가졌다.[4]
초기 설계에서는 지요다를 기반으로 15.2cm 주포 4문만 탑재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해군은 이 무장이 너무 가볍다고 판단하여 추가 무장을 요구했다.[3] 이에 따라 대어뢰정 요격용으로 '암스트롱 1894년형 12cm 40구경 단장속사포'(QF 4.7-inch Gun Mk I–IV) 6문이 추가되었다. 이 포는 최대 사거리 4000m에 분당 12발의 발사 속도를 가졌으며,[3] 방패가 달린 단장 포가 형태로 상부 갑판의 포곽에 설치되었다. 함수와 갑판 위에 각각 1문씩, 그리고 현측 중앙부 양쪽에 2문씩 배치되었다.
근접 전투용으로는 당시 군함에 널리 쓰이던 프랑스 오치키스사의 '오치키스 4.7cm 40구경 기관포'(QF 3 pounder Hotchkiss) 8문을 단장 포가 형태로 장비했다. 또한 대함 공격용으로 356mm 어뢰발사관 4기를 갖추고 있었다.
3. 2. 개량
아키쓰시마의 선체 설계는 마쓰시마급의 마지막 함선인 하시다테를 기반으로 하여, 동일한 이중 선저 구조와 방수 구획을 갖추고 동일한 기관을 유지했다.[3] 아키쓰시마는 일본이 수입 강철로 건조한 마지막 함선이기도 하다.
함선의 제원은 길이 92.11m, 너비 13.1m, 흘수 5.32m였으며, 2기의 수평 3단 팽창 증기 엔진과 6개의 원통형 보일러를 사용하여 2개의 스크루를 구동했다.[2]
초기 무장은 치요다를 기반으로 했다. 최대 사거리 9100m에 분당 5~7발의 발사 속도를 가진 6인치 속사포 4문이 상부 갑판의 스폰슨에 장착되었다. 이는 전방 돛대 양쪽의 함수에 2문, 주 돛대 뒤 함미에 2문 배치된 형태였다. 이 함포의 빠른 발사 속도는, 발사 속도가 느려 훈련 중 생도들이 "한 발 쏘면 하루가 다 간다"고 평했던 마쓰시마급에 비해 아키쓰시마가 가진 큰 장점이었다.[4]
그러나 일본 해군은 이 주포가 너무 가볍다고 판단하여 추가 무장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사거리 4000m에 분당 12발의 발사 속도를 가진 4.7인치 속사포 6문이 추가로 장착되었다.[3] 이 함포들 역시 상부 갑판의 스폰슨에 설치되었는데, 전방 돛대와 주 돛대 사이에 양측으로 2문씩, 그리고 선수루와 선미루에 각각 1문씩 배치되었다. 이 외에도 3파운드포 10문, 4연장 1인치 기관포 2문, 그리고 356mm 어뢰관 4개를 탑재했다.
아키쓰시마의 기본 설계는 상부 구조가 너무 무거워 불안정하고 항해 성능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2] 이후 보일러는 보조 보일러를 철거하고, 최종적으로는 미야하라식 보일러 8기로 교체되었다.[18] 또한 1908년(메이지 41년) 9월까지 대대적인 수리(개조)가 이루어졌다.[26]
4. 함 경력
아키쓰시마는 1890년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기공하여[28], 1892년 7월 7일 진수[28], 1894년 3월 31일에 준공되어 제1종 함정으로 분류되었다[28].
준공 직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는 풍도 해전, 황해 해전, 다롄, 뤼순, 웨이하이웨이, 펑후 제도 공략 작전 등에 참가하였다[28].
1898년 3월 21일에는 삼등 순양함으로 재분류되었고[28], 같은 해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5월 9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파견되었다[28].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 진압과 관련하여 6월부터 10월까지 옌타이(芝罘, 즈푸)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28].
1904년 시작된 러일 전쟁에서는 여순 공략전, 황해 해전, 쓰시마 해전, 사할린 작전 등 주요 작전에 참여하였다[28]. 1909년에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을 일본으로 운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7]
1912년 8월 28일에는 이등 해방함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28]. 1913년에는 뤼순 항 군 묘지에서 러일 전쟁 중 전사한 러시아 제독 스테판 마카로프의 장례식을 주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칭다오 공략전에 참전하였고, 이후 필리핀, 싱가포르 방면에서 연합군 소속으로 해상 수송로 경계 활동을 담당했다[28].
1921년 4월 30일에는 군함 분류에서 제외되어 특무정(잠수함 모정)으로 편입되었고[25], 요코스카에서 운용되었다[28]. 1927년 1월 10일 최종 퇴역하였으며[28][7], 같은 해 7월 29일 매각되어 요코스카에서 해체되었다[28].
4. 1. 청일 전쟁
1894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아키쓰시마'는 주요 해전에 투입되었다. 함장 카미무라 히코노조의 지휘 아래 공식적인 적대 행위 시작 전인 풍도 해전에 참여하여, 중국 베이양 해군의 순양함 지위안과 교전했다. '지위안'은 전투에서 이탈했지만, '아키쓰시마'는 포격함 '관이'를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이후 1894년 9월 17일 벌어진 황해 해전에서는 쓰보이 고조 제독이 이끄는 제1유격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아키쓰시마'는 중국 순양함 즈위안을 격침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그러나 '아키쓰시마' 역시 전투 중 피격되어 장교 1명을 포함한 5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키쓰시마'는 황해 해전 이후에도 다롄, 뤼순 공략 작전에 참여했으며[28],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육상 요새 점령을 돕기 위해 주로 함포 사격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 막바지인 1895년에는 펑후 제도 점령 작전과 대만 침공에 동원된 일본 함대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10월 13일 가오슝의 치허우(旗後) 포대를 포격하는 작전에도 참가했다.
4. 2.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3월 21일, 아키쓰시마는 삼등 순양함으로 재분류되었다.[28]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아키쓰시마를 파견하였다. 당시 펑후 제도의 마궁에 배치되어 있던 아키쓰시마는 사이토 마코토 함장의 지휘 아래 5월부터 9월까지 필리핀의 마닐라와 홍콩 등지에서 일본인 보호 및 경제적 이익 확보 임무를 수행했다.[28]4. 3. 의화단 운동
1900년 의화단 운동(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후지이 코이치 함장의 지휘 아래 있던 ''아키쓰시마''는 관련 임무를 수행했다. 주요 임무는 일본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보호하는 호송이었으며, 같은 해 6월부터 10월까지 중국의 옌타이(芝罘, 즈푸)에서 경비 활동을 담당했다.[28]4. 4. 러일 전쟁
1900년에서 1901년경 안정성 개선을 위해 120mm 포 2문을 제거했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이 시작될 무렵 ''아키쓰시마''는 여전히 출력이 부족하고 장갑이 부실하며 무장이 뒤떨어진다고 평가되었다. 주로 후방 지원 임무에 투입되어 일본 제3함대의 제6전대에 배속되었다. 쓰시마 경비부를 기지로 하여 쓰시마 섬에 주둔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러시아 제국 해군 순양함대에 맞서 쓰시마와 뤼순항 사이의 대한해협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1904년 2월 18일, 사령관 야마야 타닌의 지휘 아래 순양함 스마와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어, 중립에 관한 국제 규범에 따라 러시아 포함 만주르의 무장 해제를 시도했으며, 3월 31일까지 임무를 완수했다. 이후 ''아키쓰시마''는 뤼순항 해전에 참여했다. 1904년 5월 15일, 전함 야시마가 기뢰에 피격되었을 때 생존자 구조를 지원했으며, 5월 16일에는 순양함 아카시와 충돌하여 침몰한 포함 오시마의 생존자 구조에도 참여했다.
6월에는 일본 제2군을 보하이만을 건너 수송하는 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노기 마레스케 장군 휘하의 일본 제국 육군 제3군이 뤼순항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지원 포격했다.
황해 해전에서는 러시아 순양함 아스콜트를 추격했으나 격침하지는 못했다. 1905년 5월 27일에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는 사령관 히로세 가쓰히코의 지휘 하에 러시아 순양함 올레크, 아브로라 및 젬추크와 교전했다.[6] 이후 1905년 6월에는 사할린 섬 침공 당시 일본군의 상륙 작전을 지원했다.[28]
4. 5. 제1차 세계 대전
1912년 8월 28일 이등 해방함으로 등급이 변경된 아키쓰시마는 노후화된 장비와 함령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다시 투입되었다. 칭다오 전투에서는 독일 제국 해군을 상대로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 소속으로 참전했다.[28] 전쟁 기간 동안 아키쓰시마는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했다. 독일의 통상 파괴 활동과 잠수함 위협에 맞서 보르네오, 싱가포르, 마닐라, 사이공 사이의 해상 수송로를 순찰했으며, 필리핀과 싱가포르 방면에서 경계 활동을 담당했다.[28]1914년에는 안정성 개선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어뢰 발사관과 47mm 함포가 모두 제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아키쓰시마는 1921년 4월 30일에 연습선 및 잠수함 모함으로 재지정되었다. 이후 1927년 1월 10일에 최종적으로 퇴역 및 해체되었다.
4. 6. 퇴역
1912년 8월 28일, 2등 해방함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28] 노후화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다시 투입되어 칭다오 전투에서 독일 제국 해군을 상대로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 소속으로 참전했다.[7] 전쟁 기간 동안 아키쓰시마는 영일 동맹 하에 보르네오, 싱가포르, 마닐라, 사이공 사이의 해상 수송로를 순찰하며 독일의 통상 파괴 활동과 잠수함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7] 1914년에는 안정성 개선을 위해 어뢰 발사관과 47mm 함포를 모두 제거하는 개조가 이루어졌다.[7]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1년 4월 30일에 군함적에서 제외(제적)되었고,[25] 같은 날 특무정으로 편입되어 연습선 및 잠수함 모함으로 분류되었다.[7][28] 이후 요코스카에서 사용되었다.[28]
1927년 1월 10일에 특무정적에서도 제외되어 최종 퇴역하였고,[28][7] 같은 해 7월 29일에 매각되어 요코스카에서 해체되었다.[28]
5. 함장
※ 『일본 해군사』 제9권·제10권의 「장관 이력」 및 『관보』에 근거하며, 계급은 취임 당시의 것이다.
계급 | 이름 | 재임 기간 |
---|---|---|
소좌 | 우에무라 히코노조 (수행) | 1894년 6월 8일 - 12월 7일 |
대좌 | 우에무라 히코노조 | 1894년 12월 7일 - 1895년 7월 25일 |
대좌 | 우에무라 나가토미 | 1895년 7월 25일 - 1896년 4월 1일 |
대좌 | 다카기 에이지로 | 1896년 4월 1일 - 1896년 6월 5일 |
대좌 | 우리오 소토키치 | 1897년 1월 27일 - 6월 1일 |
대좌 | 무카이야마 신키치 | 1897년 6월 1일 - 6월 26일 |
대좌 | 이노우에 요시토모 | 1897년 6월 26일 - 12월 27일 |
대좌 | 사이토 미노루 | 1897년 12월 27일 - 1898년 10월 1일 |
대좌 | 나시바 도키오키 | 1898년 10월 1일 - 1899년 5월 24일 |
중좌 | 타마리 치카카타 (수행) | 1899년 5월 24일 - 9월 29일 |
대좌 | 타마리 치카카타 | 1899년 9월 29일 - 10월 7일 |
대좌 | 후지이 쿄이치 | 1899년 10월 7일 - 1900년 5월 20일 |
중좌 | 아라키 료이치 (수행) | 1900년 5월 20일 - 8월 23일 |
대좌 | 이와사키 타츠토 | 1900년 8월 23일 - 1901년 1월 23일 |
대좌 | 우에하라 신지로 | 1901년 1월 23일 - 1901년 4월 1일 |
대좌 | 가토 사다키치 | 1903년 4월 12일 - 10월 12일 |
중좌 | 야마야 타히토 | 1903년 10월 12일 - 1905년 1월 7일 |
중좌 | 히로세 카츠히코 | 1905년 1월 7일 - 6월 14일 |
중좌 | 니시야마 야스요시 | 1905년 6월 14일 - 8월 5일 |
대좌 | 우시다 주조 | 1905년 8월 5일 - 12월 12일 |
대좌 | 츠치야 미츠카네 | 1906년 5월 10일 - 12월 24일 |
대좌 | 요시미 겐카이 | 1906년 12월 24일 - 1907년 2월 4일 |
대좌 | 마노 이와지로 | 1907년 2월 4일 - 1908년 3월 25일 |
대좌 | 야마모토 타케사부로 | 1908년 3월 25일 - 5월 15일 |
중좌 | 코노 사킨타 | 1908년 5월 16일 - 8월 28일 |
대좌 | 아키야마 사네유키 | 1908년 8월 28일 - 12월 10일 |
대좌 | 나카노 나오에 | 1908년 12월 10일 - 1909년 3월 4일 |
중좌 | 시즈다 테이치로 | 1909년 3월 4일 - 11월 1일 |
대좌 | 야마나카 시바키치 | 1909년 3월 10일 - 12월 1일 |
중좌 | 아보 키요타네 | 1910년 12월 1일 - 1911년 1월 16일 |
대좌 | 카타오카 에이타로 | 1911년 1월 16일 - 6월 28일 |
대좌 | 누노메 만조 | 1911년 6월 28일 - 12월 1일 |
대좌 | 니시오 유지로 | 1912년 4월 1일 - 12월 1일 |
대좌 | 아오야마 요시토쿠 | 1912년 12월 1일 - 1913년 12월 1일 |
중좌 | 아리마 스미이 | 1913년 12월 1일 - 불명 |
대좌 | 가토 소타로 | 불명 - 1916년 1월 26일 |
중좌 | 미야지 민사부로 | 1916년 1월 26일 - 12월 1일 |
중좌 | 이데 모토하루 | 1916년 12월 1일 - 1917년 12월 1일 |
중좌 | 무카에 쿠니이치 | 1917년 12월 1일 - 1918년 7월 23일 |
중좌 | 토리사키 야스조 | 1918년 7월 23일 - 1919년 11월 20일 |
중좌 | 모리모토 토쿠미 | 1919년 11월 20일 - 1920년 11월 15일 |
중좌 | 시치다 이마카즈 | 1920년 11월 15일 - 1921년 4월 6일 |
참조
[1]
서적
The Jeune École: The Strategy of the Weak
Brill
[2]
서적
Warships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1869-1945
Naval Institute Press
[3]
간행물
Conway's All the World's Fighting Ships 1860–1905
Chesneau
[4]
웹사이트
Japanese 12.6"/38 (32 cm) Canet
http://www.navweaps.[...]
[5]
간행물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Perception, Power, and Primacy
Paine
[6]
간행물
The Fighting Ships of the Rising Sun
Howarth
[7]
서적
Prince Ito - The Man and Statesman - A Brief History of His Life
Lulu Press (reprint)
[8]
문서
全艦艇史(1994)
[9]
문서
日本の戦艦(上)2001
[10]
문서
日本近世造船史明治(1973)
[11]
문서
横須賀海軍船廠史(1973)
[12]
문서
内令提要7版/艦船(1)
[13]
문서
海軍軍備沿革
[14]
문서
日本の戦艦(上)2001
[15]
문서
日本近世造船史明治(1973)
[16]
문서
日本の戦艦(下)2001
[17]
문서
日本近世造船史明治(1973)
[18]
문서
日本近世造船史明治(1973)
[19]
문서
日本の戦艦(下)2001
[20]
문서
横須賀海軍船廠史(1973)
[21]
문서
帝国海軍機関史(1975)
[22]
문서
帝国海軍機関史(1975)
[23]
문서
海軍制度沿革10-1(1972)
[24]
문서
日本の戦艦(上)2001
[25]
문서
浅井(1928)
[26]
문서
戦史叢書31海軍軍戦備1
[27]
문서
浅井(1928)
[28]
문서
全艦艇史(1994)
[29]
뉴스
『官報』第1601号
1917-12-03
[30]
뉴스
『官報』第1793号
1918-07-24
[31]
뉴스
『官報』第2190号
1919-11-21
[32]
뉴스
『官報』第2488号
1920-11-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